작품명: 디멘시아
작가명: 송종관
분류: 장편소설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떠오르는 이름은 없습니다. 당신의 모든 기억은 더 이상 선명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길고도 오랜 시간 때문이었을까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지나간 일들의 차례가 온통 뒤섞인 느낌입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입니다. 당신은 질서 없는 생각들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기분을 편안하게 하는 아내와 가족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지만, 당신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여한 없는 삶이었고 이제 갈 일만 남았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봅니다. 따스한 봄볕이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당신은 꽃잎처럼 가볍습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꽃향기가 납니다. 눈을 감으면 멀리서 날아온 고향 소식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꽃잎의 달콤한 향기가 당신을 다른 세상으로 이끕니다. 주변은 사라지고 낯설고 익숙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갑자기 찾아오는 다른 세상이 놀랍기도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입니다. 아주 오래전 젊은 시절부터 갑자기 찾아오는 낯선 세계를 이제는 익숙하게 맞이합니다. 예전과 같은 공포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숨겨진 다른 세상인 걸 알 것 같습니다. 봄바람의 끝자락에 아슴푸레하게 묻어 있는 꽃향기에 취하다가 갑자기 찾아온 낯선 세계에서 고향 친구를 만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사지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자주 만나서 얘기꽃을 피웁니다. 천막으로 지은 막사 뒤쪽에 그늘이 있어서 둘은 그리로 가서 꽁초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고향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가지고 말이지, 부두 쪽으로 냅다 뛰어갔거든, 갔더니 남쪽으로 가는 배가 있더라구. 얼른 올라탔지. 염치 볼 거 있나. 내가 죽게 생겼는데, 허허…….”
“기렇지, 기렇지. 그래가지구 나두 거기서 어마이랑 헤어진 거 아니야. 젠장 맞을…….”
“따발총을 따르르 쏴 갈기더라구. 어이구야, 하느님아 나 살려라. 하구 납작 엎드렸지. 여기저기서 죽겠다고 비명이 나구, 난리 통인 거야. 내레 거기서 아주 뒈지는 줄 알았다우.”
혼자서 주고받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막대기로 고향 집 약도를 그리며 끝도 없는 얘기를 이어갑니다. 문득 친구가 사라집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오기나 한 걸까요. 눈을 떠서 둘러보면 친구는 사라지고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어깨를 흔들며 괜찮으시냐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봅니다.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잠깐 다녀온 그곳의 장면이 너무도 생생하여 현실과 경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다녀온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은 걸 알고 있습니다.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제 와서 의사에게 병을 진단받고 약을 먹고 하는 것이 부질없는 줄 알지만, 아내의 성화에 약을 먹고 있습니다. 약을 먹는 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이따금 찾아오는 다급한 세상에 놀랄 뿐입니다. 가끔은 예전의 여자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여자는 아무 때고 찾아와 당신을 놀라게 합니다. 여자는 언제나 같은 모습입니다. 모래 무더기가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황량한 곳에 여자가 서 있습니다.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자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습니다. 당신은 여자에게 말합니다.
“손에 든 게 뭐요?”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 발치에 손에 든 것을 던지고 돌아서 갑니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칼인 줄 알았는데 집으려고 손을 내밀면 열쇠 꾸러미로 변해 있습니다. 여자는 당신에게 가져갔던 집을 돌려주려는 것일까요. 말없이 돌아가는 여자를 향해 무슨 말인가 해야겠습니다. 할 말이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당신은 여자를 향해 소리치지만, 여자는 말없이 멀어질 뿐입니다. 당신의 말들이 여자를 붙들지 못하고 그저 보내줄 뿐이어서 화가 납니다. 당신은 큰소리로 여자에게 말합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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